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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책임지는 세이프 플레이스

2021.3.21

[독립생활] 황예지 / 포토그래퍼

[독립생활(獨立生活)]은  다양한 형태의 1-2인 가구 혹은 독립생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이 근미래의 생활을 보다 구체적이고 즐겁게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예지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사진작가 황예지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일상을 기록하던 것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며 제 주업이 되었어요. 가끔 글*도 쓰고요. 일주일에 사흘은 연희동의 미도파라는 식당에서 요리를 합니다.

© @yezoi

© @yezoi

Q. <일간 이슬아>*에서 새소년의 보컬 황소윤 인터뷰 사진이 충격적으로 좋았어요. 크레딧에서 예지님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전 작업물들까지 한참을 찾아봤던 기억이 나요. 가족사진부터 홍콩 시위 현장 다큐멘터리나, 세월호 6주기 추모 기념전까지 굉장히 다양한 작업을 이어오셨는데요. 작업의 폭이 넓어진 계기가 있을까요?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는 주로 제 관심사와 제 감정을 표현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훑고 간 자리에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저와 제 동료들이 늘 경험하는 여성으로서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나, 제 주변의 상황들, 사회 이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아직도 제가 사회부 기자가 되기를 바라는 노조위원장 출신의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해요. (웃음)

* 하루에 한편씩 에세이 작가 이슬아가 쓴 글을 메일로 보내주는 프로젝트. 황예지는 이 프로젝트 중 새소년의 보컬 황소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감독 김초희와 배우 강말금 등의 인터뷰 사진을 담당했다.

© @yezoi

 

Q. 작업의 세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아버지와 가까웠던 것 같은데요. 어쩌다 독립을 하게 되었나요?
다들 독립을 어떻게 결정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아버지랑 굉장히 크게 싸웠어요. 저와 아버지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라기보다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 친구 같은 관계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트러블이 생겨도 가족 안에서 생기는 트러블이라기보다 정말 개인으로서 마음이 상하는 거예요. 이 사람만은 나를 전부 이해해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저와 아버지가 제 진로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선언을 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일절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당시 저는 사진 작업만으로는 밥벌이가 힘들다고 생각했고 졸업 후에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할지 아직 결정도 못한 상태였어요. 과격하게 말하면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느낌이랄까요. 그 길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와 당시 만나던 애인 집으로 갔어요. (웃음)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친구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면서 독립생활이 시작된 것 같아요.

Q. 계기가 정말 과격한걸요. (웃음)
맞아요. 올해로 독립 5년 차인데 아버지는 백기 들고 들어올 줄 알았던 제가 생각보다 밖에서 오래 잘 지내니까 섭섭해하시더라고요. (웃음) 저의 경우 내가 아빠를 벗어나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정말 과격한 마음으로 독립을 한 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독립을 하는지 정말 궁금해요.

Q. 맹그로브도 그런 이야기가 궁금해서 <독립생활>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예지님과 잘 만났네요. (웃음) 독립에 대한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독립을 하게 되신 건데, 애인 집을 나와 함께 살 친구들과 집은 어떻게 구했어요?
룸메이트를 구한 과정도, 그리고 독립 후 첫 집을 구한 과정도 모두 돌발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데요. (웃음) 아빠로 부터 호기롭게 독립하고 나서 간 애인의 집도 사실 어느 정도 보호받는 공간이었죠. 애인의 집에서 나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제 진짜 독립의 시작인데요. 그때 집을 알아보고 서울의 월세 가격들을 마주하면서 정말 탄식을 했어요.

‘와, 이거 어떻게 혼자 살지? 사람들 어떻게 혼자 살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저히 내가 사회초년생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트위터에 ‘룸메이트 구합니다.’라고 올렸어요. 그랬더니 트위터로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나, 나, 나’ 손을 들었고 그렇게 같이 살게 된 거예요. (웃음)

Q. 사실 타인과 같이 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원래 트위터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나요?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라 원래 약간의 친분은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일단 여성에게는 쉽게 마음을 여는 편인 것 같아요. 여자들끼리는 뭘 해도 다 잘할 수 있다 마인드랄까요. (웃음) 우리는 대화를 할 줄 아는 동물이니까 맞춰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초기에는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했고요.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모인 친구들과 저희에게 익숙한 남가좌동에 집을 찾았고, 하루 만에 계약했어요. 한 시간 만에 룸메이트 모으고, 하루 만에 계약하고 2년을 함께 살았죠. 그중 한 친구와는 지금도 함께 살고 있어요.

예지와 현지. 두 사람은 고양이 두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지금도 함께 살고 있는 이 룸메이트와는 다섯 번도 안 만나보고 같이 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벌써 4년 넘게 같이 살고 있죠. 서로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한 상태에서 룸메이트가 되었는데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막 새벽 5시까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우리에 대한 이야기, 사회에 대한 이야기, 정말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눈 것 같아요.

그렇게 대화로 시간과 관계를 쌓았어요. 이제는 관계가 한참 쌓였는데도 이 친구는 아직도 시크하게 저를 배려해줘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익숙해지다 보니 함께 생활을 꾸려가는 암묵적인 룰도 생겼어요. 저보다 깔끔한 이 분이 청소를 더 많이 하고 저는 생활비를 조금 더 내거나 물과 휴지를 채워 넣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서로의 가족들도 가끔 집에 놀러 오고 가까이 지내요.

Q. 우연히 만난 사회적 가족 같아요. 
맞아요. 저에겐 대안 가족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룸메이트라는 단어보다는 언니? 친언니라고 생각하며 지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독립의 계기는 과격했지만 좋은 룸메이트를 우연히 만나면서 소프트랜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독립 후 두 번째 집이죠? 살 곳을 고를 때의 중요한 기준이 있나요?
룸메이트 언니가 망원동에 살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한강도 가깝고 시장도 있고 사람 냄새나는 곳에 살고 싶다더라고요. 남가좌동은 대학교 옆에 너무 붙어있어서 인파도 많고 동네가 좀 부산스러웠거든요. 신입생 환영회 소리나 축제 소리 같은 게 집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어요. 저도 언니 말에 동의했고 망원동에서 우리 생활에 어울리고 예산에 맞는 곳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 꼼꼼하게 살핀 게 있어요. 샤시가 되어 있고 볕이 잘 드는 집으로 가자고요. 남가좌동 집은 오래된 주택에 나무 마감이라 겨울에 정말 추웠어요. 둘이 함께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집을 고를 때 기준도 좀 더 명확했던 것 같아요.

Q. 아까 얼핏 봤는데 룸메이트 분의 방과 예지 님의 방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다른 둘이 같이 살면서 어우러지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고요. 
저희 둘 다 집을 이렇게 꾸며야지, 하고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각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것들을 모아둔 공간이랄까요. 친구들이 저희 집에 오면 ‘작은데 안전하다, 코지(cozy)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기뻐요. 저는 집이 세이프 플레이스(safe place)였으면 하거든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이미 밖에서 너무 많이 싸우고 경쟁하잖아요. 집에 와서는 쉬어야지, 여기서까지 서로의 미적 감각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면 전 정말 지칠 것 같아요. 밖에서 패션으로 서로 평가하고, 사진으로 서로 평가하는데 집에서까지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내가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산 가족은 아니지만 4년 가까이 살면서 맞춰가고 있는 룸메이트가, 이 집이 저의 세이프 플레이스가 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요.

Q. 그러고 보니 정말 조명이나 소품의 배치가 정말 아늑해요. 골목은 낯설었는데 예지님 방에 들어오니 다른 세계로 진입한 느낌이랄까요. 이런 세이프 플레이스에서 나만의 무드로 하루를 꾸릴 때 지키는 루틴이나 리추얼이 있나요?
일단 집에서는 정말 많이 누워있는 편인 것 같아요. (웃음) 밖에서 너무 치열하게 살다 보니 집에서는 쉬고 싶어 져요. 그러면서 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향을 피우고 기분에 따라 음악을 틀어요. 어느 날은 유튜브로 어느 날은 LP로. 특별히 정해둔 방식은 없어요.

그리고 제 방 곳곳에 저를 수호한다고 느껴지는 기물들을 갖다 놨어요. 엄마가 사준 쿠션, 제일 친한 친구가 사준 쿠션, 홍콩에서 주워온 나뭇잎, 친구가 사준 포스터. 구석구석 제게 소중하고 안정감을 주는 물건들을 배치해놓고 기운을 차리고 싶을 때마다 살펴봐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요. 침대 맡 걱정인형도 제가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룸메이트가 저를 위해 만들어준 거예요.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제게 소중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세이프 플레이스(safe place)예요.

Q. 예지님은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가르치는 일도 하고, 또 요리도 해요. 글이나 사진은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의 변주이지만 요리는 종류가 다른 일처럼 느껴지는데요. 어쩌다 바에서 요리를 하게 되었어요?
글이든 사진은 뭔가 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저는 진짜 느리거든요. 행동이 느리다는 게 아니라 사고 회로가 느려요. 오래 생각해야 하고 오랜 성찰의 과정이 필요해요. 그러다 보니 사진으로 돈을 벌긴 힘들겠다는 판단을 했죠. (웃음) 그래서 그 이후로 여러 가지에 부딪혀 봤어요. 광고 대행사도 들어가 보고 세계 과자 할인점에서 알바도 해보고 ‘내가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많이 해봤어요. 결과는 전부 그저 그랬어요. 그러다 제가 평소에 집에서 요리해서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파티시에 친구가 ‘한번 일해볼래?’라고 제안해서 하게 된 거예요. 취미로 하던 걸 일로 했는데 웬걸,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 맞는 거예요.

Q. 어떤 점이 예지님과 잘 맞았어요?
사진은 어떤 순간을 즉흥적이고 감각적으로 잡아내야 한다면, 요리는 누군가에게 선보이기 전까지 프렙(준비)하는 과정이 꽤 오래 필요해요. 사진은 디지털 디바이스를 오래 봐야 하기 때문에 눈이 자주 아픈데 요리는 비교적 원시적이라는 느낌을 줘요. 타오르는 불을 보고, 빵이 부푸는 모양을 보고, 신선한 농산물을 고르죠. ‘얘는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을까’ 생각하며 잠깐 자연에 다녀오는 기분이에요. 이런 다른 과정이 제게 신선한 자극과 행복감을 줘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애써서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 제가 누군가에게 좋은 시간을 선사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꽤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사진 일 하는 틈틈이 요리하는 일도 해요.

Q. 요리하는 과정의 순간순간이 사진가로서 본질적인 것에 더욱 예민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예지님은 하나의 공간에 머물면서 영감을 받기보다 여러 관계 속에서, 사회에 나가서 예지님이 보는 것들 속에서 영감을 받는 것 같아요. 
맞아요. 밖에서 보고 온 것들을 세이프 플레이스인 집에서 쉬면서 소화하죠. 그 소화 과정 속에서도 계속 인풋을 하긴 해요. (웃음) 끊임없이 이미지 생태계를 살펴요. 어떤 사진들이 탄생하고 있고, 이 이미지 흐름 안에서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 나도 알고 있어야 해요. 저 역시 그 이미지 생태계의 일원이니까요. 사진가는 자기 눈을 많이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 창조해낸다는 것은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이잖아요. 끊임없이 축적해야 내게도 책임을 질 수 있는 좋은 눈이 생겨요.

Q. 독립하니 가장 좋은 건 무엇이에요?
나 스스로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고양이 밥 안 굶기고, 내게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는 물건들을 내 돈으로 사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거나 사줄 수 있고. 그런 작은 소비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나만의 경제력이 생긴 것. 내가 꾸려가는 나만의 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 것이 정말 좋아요. 이전에는 제가 생각보다 의존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아요. 관계에 기대고 연애에 기대고.

요즘은 제가 저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정말 행복한 상태인 것 같아요.

 | 김진영
사진 | 엄종헌, 황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