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맹의 제주 워커스>
10 Jeju Workers
제주 로컬을 기반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워커 10인을 만납니다. 제주의 헤리티지를 보존하고, 제주 밖으로 제주를 알리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들이 제주에서 펼치는 라이프스타일과 근사한 작당모의를 살핍니다.
*제주 방언으로 ‘명’을 ‘맹’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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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언
@summer_mungusa
구좌읍 세화리에서 9년째 문구사를 운영한다. 최근 제주에서 문구사를 운영하며 겪은 이야기를 엮은 일상툰 <여름문구사>를 발간했다.
여름 문구사의 탄생의 비화(!) 그리고 주요 서사를 소개해 주세요.
여름문구사 시작 전에는 용눈이오름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서 마을이 가져다 놓은 컨테이너를 빌려서 작은 상점을 했어요.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팔았는데, 전기도 물도 없어서 생수와 얼음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사용했어요. 벌이가 좋진 않았지만 소소한 낭만이 있었죠. 그러다 더 이상 컨테이너를 빌릴 수 없게 됐고, 무얼 할지 고민하던 중 현재 가게 자리에 임대가 나온 걸 알게 됐어요. 지날 때마다 늘 공간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덜컥 계약부터 해버렸죠. 작고 귀여운 것, 좋아하는 문구류나 기념품을 팔자고 마음을 먹었고요.
제주에 사는 건 어떤가요. 제주살이를 꿈꾸는 이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제주에 산다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저 역시 특별함을 꿈꾸며 제주에 왔지만, 여행지에 살아도 일상이 되면 다 똑같아요. 너무 새로운 것을 기대하면 오히려 금방 실증을 느낄 수도 있어요. 다만 가까운 거리에 바다와 숲이 있는 것, 시골이지만 종종 핫플레이가 있는 특별함이 있지요. 섬이니 고립되었다고 생각하면 답답한데, 자유롭다고 생각하면 무진장 자유로운 이중성이 있죠. 큰 기대 없이 작은 즐거움을 원한다면 만족할 거예요.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행위 세 가지를 꼽는다면.
쉬는 날에 오름이나 숲에 걸으러 가는 것, 민속보존회에서 장구 치는 것,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거요.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잘하진 않습니다. 쉬는 날마다 부지런히 걷지만 날씬하지 않고요. 2년째 장구를 치지만 아직 가락보도 잘 못 외우고, 흥만 넘치고 징하게 못 쳐요. 동네 사람과 놀 때는 재밌지만, 싸우고 서운함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할 때 가장 신나고 기운이 충전돼요.
제주에서 일하며 사는 워커로서의 삶, 어떤가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보기에 배부른 한량일 수도 있겠죠. 제주에 살아도 힘들다며 핏줄 세워 부정했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이제는 게으른 한량 맞다고 인정합니다. 근데 자발적 한량일수도 있고, 환경이 주는 강제적(?) 한량일수도 있어요. 밤 늦게까지 영업하고 싶어도 손님이 없어요. 쇼핑몰이나 백화점이 없고 새벽 배송도 안되니 이정도 버는 것으로 충분하다 느껴지니까요.
No! 큰 기대
Yes! 작은 즐거움
특별한 신념 같은 게 있을까요. 한 문장으로 표현해도 좋아요.
성격이 소심한 편이라 손님이 큰 기대를 안고 왔다가 실망하는 게 겁이 났어요. 일부러 찾아올만한 가게가 되길 바라며 고민은 하지만, 그걸 내세우진 않죠. 우연히 발견한 작은 즐거움이 가득했으면 싶어요. 그래서 가게 문짝에 ‘노! 큰 기대, 예스! 작은 즐거움’이라 적었어요. 그게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도 잘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작은 즐거움들을 찾으면 망치거나 실망할 일이 적어요.
최근 있었던 일 또는 제주와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면요.
얼마전에 백중맞이 행사로 조천읍 북촌리에 가서 길놀이를 했는데요. 이 재밌는 걸 왜 이제까지 몰랐는지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저녁 7시쯤 두 팀으로 나뉘어서 각각 마을의 끝으로 가서 길놀이를 시작해 마을을 구석구석 돌았어요. 예전에 길놀이를 할 때는 관공서로 가서 직원들의 안전과 무사를 빌었는데,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의 집에도 갔어요. 어떤 집에서는 흥 많은 삼춘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해서 잔뜩 신나 장구를 쳤죠. 마당 쪽으로 난 창문을 열자 병상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는 것이 눈으로 자꾸 들어와 어찌나 힘들던지요. 울면서 웃으면서 장구를 쳤습니다. 모두가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했겠죠. 제주에 온지 14년째인데, 이제 좀 제주 사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주에서 좋아하는 곳, 또는 가장 제주다운 곳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사라봉과 사라봉 아래 탑동 바닷가를 좋아합니다. 조용한 숲도 좋지만 대도시의 공원도 좋아하는데, 사라봉은 시내에 있어서 늘 사람이 많아 비슷한 느낌이 납니다. 봄에는 벚꽃이 지천에 널리고, 해 질 녘 노을도 참 멋지죠. 사라봉에 오르면 목포에서 오는 배도 볼 수 있어요. 짧은 운동 코스로도 좋고, 들인 노력에 비해 멋진 풍경을 보여주죠.
장래희망이 뭔가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요.
목욕탕을 좋아해서 작은 목욕탕 주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동화책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동화책을 한권 써보고 싶어요. 또 속 좁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넒은 마음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옹졸한 어른만큼은 안되고 싶습니다. 작은 가게에 혼자 오래 있다 보면 세상 마음이 좁아질 때가 많은데요. 그럴 때 오름이나 한라산에 올라가 제주를 보면서 ‘여기서도 보이지도 않는 저 작은 곳에서 아등바등 속 좁게 살았구나’ 하며 반성합니다. 근데 그게 또 잠시라 내려오면 그 마음이 빠르게 사라지더라고요. 평지에서도 옹졸하지 않은 마음의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글, 사진 | 콘텐츠 그룹 재주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