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grove Sinchon with 배철수
뿌리 깊은 청년 문화와 언더그라운드 컬처가 싹튼 특별한 로컬, 신촌에 자리한
‘맹그로브 신촌’의 오픈을 기념하며, 80년대 한국식 록 음악을 선도하고 청년 문화를 이끈
밴드 송골매의 프런트맨, 배철수 님을 만났습니다. 그 시절 신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생기 넘치는 청춘들의 음악 이야기는 물론, 지금의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특별한 이야기들도 맹그로브 저널을 통해 만나보세요.
7080년대 서울 장안에서 음악 좋아하는
청년들은 모두 신촌에 모였죠.
Q. 송골매의 전성기이기도 한 70~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고향이라 불리며
청년 문화 예술이 부흥했던 그 당시, 신촌의 분위기가 궁금해요.
신촌은 큰 대학이 세 곳이나 몰려 있는 대학가잖아요. 제가 72학번이거든요. 저는 근처 항공대를 다녀서 군대 가기 전까지 신촌에서 많이 놀았었죠. 그 당시 연대 앞 ‘독수리 다방’이라고 노래를 신청하면 DJ가 음악을 틀어주고 하는 음악다방이나 카페에 젊은 친구들이 많이 모였어요. ‘가야’라는 큰 음악 카페도 있었고, 이대 앞에 ‘오엑스’라는 카페도 자주 갔어요.
78년에 제가 대학가요제를 나가고 79년부터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했는데, 신촌로터리 건물 5층에 ‘우산속’이라는 유명한 클럽이 있었어요. 거기서 밴드 초창기에 연주도 많이 하고 했죠. 88년도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만들어진 건너편 ‘컴 88’이라는 클럽에서도 연주하고요. 당시 학생들, 젊은 친구들이 많이 놀러 왔어요. 아무튼, 7080년대는 서울 장안에서 음악 좋아하고 조금 논다 하는 애들은 모두 신촌에 모였죠.
Q.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랑받았던 80년대에 신촌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 있는 곳이 신촌밖에 없잖아요. 종합대학만 세 곳이 있으니 얼마나 커요. 미국으로 따지면 거의 보스턴 같은 곳이죠. 지금은 완벽하게 상업화되었지만 옛날에는 대학 문화의 중심이었던 거죠.
젊은이들이 그때는 모두 록 음악을 들었어요. 70년대 후반부터 대학 가요제에서 각 대학의 스쿨 밴드들이 상을 받고 샌드페블즈, 활주로, 블랙 테트라, 옥슨 80 이런 팀들이 가요계로 쏟아져 나왔죠. 그때는 대학에 록 밴드가 몇 팀씩 있었어요. 그때는 힙합도 나오기 전이고 록이 젊은이의 음악이었어요.
Q. 356일 중 현충일 단 하루 클럽이 쉬는 날이었다고요.
직장인이 회사에 출근하듯 매일 같이 공연하던 시절, 청년 배철수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방송 출연료는 몇 푼 안 되고, 그 당시 방송에 나가면 가수들은 몸만 가면 되지만 밴드는 악기를 직접 다 가져가야 하니까 오히려 더 손해였어요. 그리고 음반도 지금처럼 로열티 이런 것들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라 처음에 레코드 회사와 계약할 때 받는 돈이 전부였죠. 그다음에 음반이 얼마나 팔리고 이런 것과는 관계없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데라고는 클럽에 가서 밤새 연주하는 것 밖에는 없었죠.
나이트클럽은 안 놀거든요. 현충일 하루만 문을 닫고, 1년 365일 늘 클럽에서 밤을 꼴딱 새우면서 음악을 한 거죠. 그렇게 오래 하다 보면 완벽하게 일이 되는 거죠. 창작 활동이나 예술 활동이 아니고 그냥 진짜 근로가 되는 거지 근로. 힘들었죠. 오죽했으면 음악을 그만뒀겠어요.
젊은이들은 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는 거 아닌가요? 저 같은 경우 원래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에 갔어야 하는데, 직장을 안 가고 음악을 선택했으니까요. 밴드를 시작을 했으니까 어쨌든 이 밴드를 잘 해야겠다 생각했죠. 그다음에 음악을 잘 해야겠다 생각하고요. 프로페셔널로 처음에 연주를 할 때는 음악이라는 게 꼭 테크닉만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기술적인 부분이 너무 모자라더라고요. 프로페셔널 밴드들하고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처럼 그 당시 저도 당장 눈앞에 있는 그런 고민과 불안들을 해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Q. 남자가 혼자서 방을 쓸 수 있는 건 가난한 독신 시절까지다는 말이 있어요.
청년 배철수의 첫 독립은 언제였나요?
집이 어려워지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가 살았어요. 공부를 못하는 친구네 집에서 같이 살면서 같이 공부하기를 바라셨는데 친구 부모님 바람과는 반대로 가서 같이 놀아가지고 좋은 성과는 안 나왔죠. (웃음) 대학교 1학년 때도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으니까 이미 그때부터 독립한 거죠. 그러다 군대에서 77년에 전역하고, 78년에 가요제 나가고 하면서 그다음에는 동생과 함께 부모님을 부양하면서 살았어요.
지금 아이들은 이해가 안 가겠죠. 우리 시대만 해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완벽하게 어른이라는 자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내 진로에 대해서 부모님과 상의를 해본 적이 없어요. 대학도 내가 정해서 여기 가야 되겠다, 음악도 내가 해야 되겠다 이런 식이었죠.
Q. 요즘의 힙합, 케이팝의 인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독보적인 스타일과 에너지를
가졌던 80년대 K-로큰롤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음악은 사실 서양 음악이잖아요. 우리도 비틀스, 롤링 스톤즈, 딥 퍼플, 레드 제플린, 이런 음악들을 듣고 처음에는 그걸 따라 하는 걸로 시작이 되는 거죠.
또 그래서 과연 한국적인 록 음악은 무엇인가 한다면 예전에 신중현 선생님이 70년대 초반에 ‘신중현과 엽전들’이라는 밴드를 하셨어요. 거기에 보면 ‘미인’이라는 엄청난 히트곡이 있어요. 굉장히 한국적인 음계를 가지고 만드신 곡이죠. 어린 나이에 저도 그 곡을 듣고 이렇게 해도 록 음악이 되는구나 했어요.
송골매를 하는 동안 계속 한국적인 록 음악을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노력은 했던 것 같아요.
Q. 33년째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DJ로 활동하며 라디오 공무원이라는 별칭도 얻었어요.
한 가지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끝에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옛날부터 그랬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뭘 하면 남보다 굉장히 빨리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잘 했어요. 공부, 축구, 장기, 바둑도 조금씩은 다 하는데 한 가지도 전문가처럼 정말 잘하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나의 가장 큰 단점이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90년에 라디오 디스크자키를 하면서 ‘야 이게 방송 일이 딱 맞는구나’ 했죠. 방송 진행자는 한 가지를 너무 많이 알 필요가 없더라고요. 너무 많이 알면 오히려 상대방 이야기에 흥미도 없고 유치하게 들리거든요. 패션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러면 패션 전문가를 불러서 얘기를 하면 되고, 축구 선수가 나오면 또 축구 얘기, 배우가 나오면 또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고, 방송하는 사람한테는 이게 장점이 되는구나 하고 디스크자키를 계속하게 되었어요.
일단 한 가지를 오래 하면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있잖아요. 10년 하니까 팝송 디스크자키 쪽에서는 굉장히 전문가가 되더라고요. 이제 한 30년을 하니까 사람들이 확실하게 인정해 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어떤 사람이 타일 붙이는 일을 30년을 했다더라, 그럼 그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잖아요. 그런 이치라고 생각해요.
Q.음악을 소비하는 형태와 방식이 이처럼 다양해진 시대에도 매일 저녁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주파수를 맞추는 청취자들의 마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요즘은 다들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잖아요. 기계가 추천해 주는 음악을 계속 듣다 보면 사람이 작은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것 같아요. 다양한 음악을 듣고 싶을 수 있는데 맨날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음악만 듣고 있으면 대부분이 비슷해서 금세 싫증이 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조금 색다른 걸 듣고 싶을 때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아요. 라디오는 음악만 계속 나오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얘기도 하고요.
또, 중요한 것은 음악을 다른 많은 사람들과 지금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있잖아요. 같이 듣고 있다, 내가 지금 서울에서 듣고 있지만 부산에도 이 음악을 듣고 있고, 해외에서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람은 어느 집단에 속해 있을 때 굉장히 안정감을 느낀다고 그러잖아요.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해서 같이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청취자들이 이런 사연도 많이 보내요. ‘오늘 이 음악을 하루 종일 들었는데 음악 캠프에서 같이 듣고 싶다.’
안 되는 걸 나중에 알게 될 수는 있지만 젊을 때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문화를 바꾼다!’인 거죠.
Q. 배철수 하면 시그니처처럼 떠오르는 목소리를 위해 담배도 끊고,
방송에서 특히 바른말, 표준어를 사용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기울인다고 들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게 전국으로 방송이 되고 그걸 후배들과 사람들이 듣고, 공감을 하고, 듣다 보면 따라 하게 되고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더라고요. 누군가 가지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무렇게나 한 얘기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피곤한 일이에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거든요. 음악을 하는 것도, 방송을 하는 것도 기왕이면 좋은 영향을 끼치면 좋잖아요.
Q. ‘영원한 청년’ ‘젊음의 상징’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녀요.
예전과 요즘의 청년들은 어떻게 다르다고 느끼나요?
그럼에도 세대불문 변하지 않는 청년이 상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뭐라고 그럴까, 젊은 친구들은 선진국 아이들인 것 같아요. 주눅 든 게 없어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우리 때는 일단 무조건 굽히고, 얘기도 못 하고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자기주장을 잘 얘기하는 것 같아요. 나이 든 사람들은 버릇이 없다는데 저는 그렇게 볼 건 아니라고 봐요. 훨씬 더 좋더라고요. 자기 얘기 딱 딱 하고, 가끔 얄미울 때는 있지만요. (웃음)
반면에 청년의 상징은 반항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새 친구들은 반항을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선진국 아이들이라 그런가. 우리 때는 기성세대를 무조건 거부했거든요. 부모가 됐든, 누가 됐든, 일단 반항! 정말 젊을 때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되는 거 아닌가. 안 되는 걸 나중에 알게 될 수는 있지만 젊을 때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문화를 바꾼다’ 이 모든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반항으로 가야 되는데 요새는 너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요.
Q. 매일 새로운 팝 음악을 소개하는 DJ로서, 최근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던 음악 또는 아티스트가 있나요?
새 음악을 계속 들으니까 한 음악이나 한 가수를 택하기는 참 어려워요. 요새는 엊그제 그래미 상 받은 리조 Lizzo라는 친구 있어요. 원래 대학에서 플루트 전공하던 아가씨인데 당당한 태도가 정말 멋있더라고요. 옛날에는 뚱뚱하면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고 다이어트하고 그랬잖아요. 음악도 너무 잘하고요.
또, 요새 정말 좋아하는 가수는 브랜디 칼라일 Brandi Carlile이라고 있어요. 나이는 꽤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등장한 가수죠.
개성 강한 애들이 모여서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서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건 정말 아름다우면서 숭고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Q. <배캠> ‘음악캠프 라이브’ 코너에서 꾸준히 젊은 인디밴드들을 초대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록은 여전히 주류 문화라고 보기 어렵지만, 앞으로 한국 로큰롤이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은 이미 록 음악의 시대가 아니에요. 이제 여러 음악 장르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20, 30년대, 40년대까지도 세계의 주류 음악은 재즈 음악이었거든요. 스윙 재즈, 빅밴드 재즈 이런 장르가 엄청 유행하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와서 방송사마다 다 악단이 있었어요. 이봉조 악단, 김인배 악단, 그때는 텔레비전에도 악단이 있고, 라디오에도 악단이 있었죠.
지금은 록 음악도, 재즈 음악도 완전히 마이너 장르가 되었지만, 지금도 재즈 음악을 여전히 하고 있고 재즈 음악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기법이나 음악적인 구성이나 이런 것들이 모든 장르의 음악에 다 들어가 있거든요. 그러면 되는 거죠. 록 음악이 갖고 있는 형식, 저항 정신, 사상 이런 것들이 케이팝에도 들어갈 수 있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된다고 생각해요.
Q. 작년 송골매의 40주년을 맞아 전국 투어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며 “라스트는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항상 롤링 스톤즈, 이글스처럼 송골매가 오래가는 밴드가 되길 원했다고요. 송골매의 라스트는 어떤 모습일까요?
마지막으로 공연을 해보자는 이야기는 구창모 씨와 한 10여 년 전부터 해왔어요. 워낙 친하니까요. 막연하게 생각을 하다가 코로나 터지던 해에 급하게 진행이 되면서 연기되었다가 결국은 22년에 하게 된 거죠. 30년 동안 음악을 안 하고, 구창모 씨와 같이 하는 건 거의 40여 년 만인데 사람들이 누가 오겠느냐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한 공연이었어요.
재밌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뿌듯하기도 하고, 또 체력적으로는 힘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인 기분이 들었어요. 라스트는 없어요. 마지막이고 이게 끝입니다. 그런데 공연 기획사하고 계약할 때 공연을 10번 하기로 계약했는데, 9번을 했으니 이제 1회가 남았네요. 1회는 해줘야죠. 남은 1회는 앙코르 공연이 되지 않을까요?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
Q. 코리빙 하우스 맹그로브는 활발한 커뮤니티로 잘 알려져 있어요.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보컬 등 밴드도 다양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작은 커뮤니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밴드는 인원이 몇 명이 되었든 서로 소리를 내서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 내야 해요. 절대 혼자 잘한다고 되지도 않고, 혼자 튀어서도 안 돼요. 좋은 음악을 하려면 상대방 소리를 잘 들어야 하죠. 자기 혼자 하는 대련이 아니니까.
그런데 또 밴드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너무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때는 부모 말도 안 듣고 음악 한다고 나온 놈들인데 누구 말을 듣겠어요. 그런 정말 개성 강한 애들이 모여서 뭔가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서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건 정말 아름다우면서 숭고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맹그로브도 여러 명이 모여서 함께 사는 곳이잖아요. 밴드랑 똑같다고 생각해요. 다 자기의 의견도 있고 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건데, 남의 의견도 잘 들어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좀 맞춰 가고 이런 것들이 잘 되어야 결국 밴드도 잘 되고 회사도 잘 되고 커뮤니티도 잘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Q. 로큰롤 밴드 송골매의 프런트맨으로 시작해 최장수 라디오 DJ로 오래도록 한 길을 걸어가는 음악인으로서, 청년들에게 좋은 음악을 찾고 듣는 방법을 조언해 주신다면요.
음악을 듣는 것은 음식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평생 한식만 먹은 사람은 사는 데는 지장은 없겠지만 손해를 보는 거잖아요. 물론 한식이 맛있죠. 하지만 한식 이외에도 정말 많은 음식 있잖아요. 전 세계에 인도 카레, 쌀국수, 똠얌꿍도 있는데 평생 한식만 먹은 사람은 못 먹는 거니까요. 음악도 똑같아요.
한 번 사는 인생,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즐거움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버틀란트 러셀의 이야기가 있어요.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
행복이라는 게 뭐 별거 아니잖아요. 젊은이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어요.
글 | 신다보미
사진 | 이석현